
Life is random. 애플이 2005년 iPod Shuffle을 출시했을 때 내세운 광고문구이다. iPod Shuffle은 기존의 MP3 플레이어에 있던 LCD스크린을 과감히 없애버린 MP3 플레이어였다. MP3 플레이어에 당연히 있어야 할 부품처럼 여겨지던 LCD스크린을 과감히 내던지고, 그로 인해 겪을 수 있는 불편을 애플만의 미학으로 위와 같은 문구로 포장했다. LCD스크린 없이도 얼마든지 음악을 들을 수 있기에, 그 당시에는 내 옆에 있는 MP3 플레이어의 LCD 스크린이 구차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애플은 LCD스크린을 내던짐으로써 가격을 과감하게 낮추고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Simplicity의 극치를 완성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망해가던 회사에서 시가총액 전세계 1위, 전세계 휴대폰 판매 이익의 80% 가까이를 독식하며 한해 매출만 260조원(2016 회계연도 기준) 가까이 기록한 회사로 거듭난 애플, 21세기 들어 최고의 혁신이라 칭송 받는 아이폰을 만든 애플의 힘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2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버리고 본질에 집중하며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하는 힘, 둘째는 남과 다른 생각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다.
1997년 애플에 복귀한 스티브잡스는 망해가던 애플을 구하기 위해, 2가지 액션을 단행했다. 가장 먼저 기존에 복잡하고 다양했던 애플의 제품 라인업을 단 4개의 제품군으로 통폐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불필요한 리소스의 분산과 낭비를 줄이고, 핵심에 집중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아울러, 애플의 재건을 알리고 핵심가치를 정의함으로써 조직과 소비자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브랜드캠페인을 진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애플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인 Think Different다. 단순함에 대한 남다른 집착과 더불어 기존에 남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것을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핵심가치는 그들의 제품에 그대로 투영되어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혁신을 만들어 냈고 이는 오늘날 가장 모범적인 경영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애플이 추구하는 경영원칙이며, 단순함 그 자체를 이루기 위해 애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핵심가치를 정의하는 일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핵심과 본질에 집중하는 것, 즉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개인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나 기업을 경영하는데 있어서나 공통적으로 유념할 부분이다.
그렇다면, 애플처럼 핵심가치를 정의하고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한다면 다른 기업들도 충분히 혁신을 만들고 성공할 수 있을까? 극도의 단순함은 모든 기업의 경영원칙에 통용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저자는 애플이 일하는 방식과 델 및 인텔이 일하는 방식을 자주 비교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애플과 델, 인텔에서 각각 광고를 기획하며 경험했던 프로세스를 언급하며, 애플이 단순한 프로세스를 유지하여 최고의 마케팅 성과를 내고 있는 반면에 델이나 인텔은 그들의 복잡한 프로세스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구체적으로, 애플의 경우 최고경영자인 스티브잡스가 직접 광고에 대한 의사결정을 진행하는 단순한 프로세스를 진행했던 반면, 인텔의 경우 광고를 집행하기까지 여러 단계의 의사결정과정이 필요하며, 그들이 내린 의사결정에 대한 확신이 없어 포커스그룹 인터뷰까지 진행하는 인텔의 모습을 한심한듯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가 간과한 것은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도 결국 업(業)의 특성과 조직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인텔은 본질적으로 무결점을 추구하는 회사다. 0.00000001의 오차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업의 특성을 갖고 있다. 인텔은 지난 1994년 펜티엄 프로세서에서 발생했던 부동소수점 연산 오류로 한차례 큰 홍역을 치른 아픈 경험이 있다. 반도체공정은 마이크로 단위의 먼지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극한의 무결점을 지향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조직에서 애플과 같은 극도의 단순함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델도 기본적으로 B2B 거래가 회사의 주요 핵심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B2B 거래는 기본적으로 높은 신뢰성과 더불어 절차적인 정당성을 보장해야 하는 거래다. 이러한 업의 특성에서 절차를 생략하고 애플과 같은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인텔이나 델과 같은 기업이 단순함을 조직경영 전체에 일반화하여 체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결국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도 업의 특성과 본질에 따라 커스터마이징 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버릴 것은 버림으로써 단순함을 추구할 수 있다. 1997년 애플 세계개발자회의에서 잡스는 혁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사람들은 집중해야 할 대상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이 참된 집중이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집중이란 그 밖의 다른 좋은 아이디들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실제로 우리가 한 일 못지 않게 하지 않을 일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수많은 것들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혁신입니다.”
스티브잡스가 숨을 거둔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류 역사에 애플과 스티브잡스와의 관계만큼 기업과 CEO가 일체화 된 사례가 있을까? 애플의 표상이나 다름없던 잡스가 사망했을 때 애플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는 이가 많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애플은 여전히 기업경영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다르게 생각하며 세상을 바꾸겠다는 가치, 극도의 단순함에 대한 추구로 요약되는 스티브잡스의 DNA가 애플의 기업문화로 잘 녹아 들어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애플이 이러한 DNA를 꾸준히 유지하며, 또 한번 멋진 파괴적 혁신을 이루어내길 기대한다. 2009년 11월 아이폰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신세계적 감동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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